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다 미츠나리 (문단 편집) == 평가 == 강한 충성심을 가졌고 [[행정]] 능력이 뛰어난 정치가로서 도요토미 가문 최후의 기둥이었다. 그러나 좋고 싫음을 노골적으로 내색하는 성격 탓에 적을 양산하였고 결국 주가(主家)의 멸망을 막지 못했다. 상대방은 일부러 미츠나리의 취향을 맞추려다 마음에 들지 않아 도리어 호통이나 면박을 듣기도 했으며[* 예컨대 어떤 사람이 미츠나리에게 [[미인]]을 대접했다가 호통을 들은 일화나 미츠나리가 목이 마르다고 호소하는 것을 홍시를 건네며 목을 조금 축이라고 한 옥졸의 배려에 더울 때 홍시는 건강에 좋지 않다며 거절한 점 등.] 이런 미츠나리의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에게 그 인망은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고 결국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인망도 인망이지만 당시 근신 중이라 자신이 직접 거병하지 못해 [[모리 테루모토]]에게 도움받아야만 했다.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는 "미츠나리는 도요토미에 충성을 다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농민]] 출신인 데다가 단기간에 많은 [[다이묘]]를 휘하에 두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가장 중점에 두었어야 할 것은 각 다이묘들을 효율 있게 통제할 방편과 함께 가신들의 분열을 막고 통합을 꾀하는 한편 도요토미 가문을 향한 확고한 충성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면에서 미츠나리는 행정 재능은 좋았고 직속 부하에게는 충성을 받았지만 융통성 없음을 확실하게 보여준 나머지 가장 중요한 마지막 부분에서 실패하여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으로 향하는 한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내인 [[가라샤]]를 인질로 잡으려 했으나 가라샤를 [[자살]]하게 한 일이나 무단파이자 원래라면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장성할 때까지 지켜줄 무투파 [[시즈가타케의 칠본창]]과의 갈등, [[우에스기 가게카츠]]의 난을 [[세키가하라 전투]]로 키운 일 등이다. 가라샤의 일로 대다이묘였던 호소카와는 이를 갈며 동군에 참여했고 [[임진왜란]] 시기부터 이미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을 비롯해 유력한 다이묘들이 세키가하라 전투 때 죄다 동군에 붙은 점은 미츠나리 본인의 부덕과 인망없음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아주 뼈아프다. 막상 [[시마즈 요시히로]]가 돕겠다고 나서도 [[병력]]이 1500명밖에 안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마즈 요시히로를 박대하여 사사건건 부딪혔고 히데요시 생전부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박대했는데도 히데아키가 서군 입장에서 미츠나리를 계속 따르리라고 판단한 것도 패착이었다. 좋고 싫음을 표가 나도록 확실히 하는 성격은 적을 많이 만들고 말았지만 반대로 미츠나리의 솔직한 성품에 끌린 인물도 많았으며 미츠나리는 자신의 편에 선 사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잘 대했기에 수하 가신들 대부분이 목숨을 바친 것도 특징이다. 최초의 영지 500석을 받았을 때 자신의 모든 영지를 주고서 영입한 와타나베 신노죠는 히데요시가 2만 석을 줄 테니 자신의 가신이 되라 하자 "10만 석을 주면 생각해 보겠다."라고 했던 인물이었다. 후에 4만 석 영주가 되었을 때는 절반인 2만 석을 주고서 [[시마 사콘]]을 자신의 가신으로 만들었다. 이때 히데요시는 '어떻게 사콘 정도나 되는 인물을 영입할 수 있었는가', '주군과 가신의 봉록이 같은 예가 어디에 있는가'라며 놀랐는데도 나중에 따로 사콘을 불러 "미츠나리를 잘 부탁하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미츠나리 휘하로 참가하였던 무장들의 대다수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가하였는데 [[오오타니 요시츠구]], [[사타케 요시노부]] 등의 인물들은 인정과 우정 때문에 이시다 미츠나리의 편에 서려고 서군에 가담했다. 단, [[사나다 마사유키]]는 일단 자신의 차남 [[사나다 노부시게]]가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딸과 결혼한 사이이기도 했고 도쿠가와와는 센고쿠 시절부터 그리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더욱이 우에스기와 도쿠가와의 충돌로 도쿠가와가 우에스기에 집중하는 동안 서군이 간토 6주를 재빠르게 쳤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가족 회의서 장남인 노부유키를 도쿠가와 측으로 보냈다. 전장에서 살아남고 이에야스에게 용서받은 남자들조차 도요토미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미츠나리의 유지를 성실히 지켜 이후 [[오사카 성 전투]]에 가담했다가 전사하는 길을 택했다. 특히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미츠나리에게 도쿠가와와 등을 돌리지 않는 쪽으로 설득을 시도했으나 미츠나리의 의지가 단호하였기에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같이 서군에 가담한 것이다. 결국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일생의 친구로서 미츠나리를 이롭게 하려고 목숨을 바친 것과도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일본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의 인물로서는 색다른 성격에 색다르게 살아간 남자이며 싫어한 자에게는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받았고 좋아한 자에게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줄 정도로 사랑받았던 남자였다. 실제로 [[오사카 성 전투]]에서 수많은 다이묘가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려고 모든 걸 버렸을 만큼 도요토미 가문에 심정적으로 극히 충성하던 사람이 많고 미츠나리에 대해서도 좋게 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만약 미츠나리가 적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알고 적당히 융통성을 부리는 사람이었다면 일본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일본]]에서는 오시 성 전투의 전후 사정을 다룬 분석이 진행되면서 오시 성 졸전의 책임이 미츠나리가 아닌 히데요시에게 있다는 점이 밝혀져 미츠나리가 재평가되었고 그 덕분에 '졸장'이라는 기존 평가가 어느 정도 불식되었다. 그렇지만 역시 군재는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문제는 일본 사람들이 전쟁사로서의 일본 전국시대를 인지하는 정도가 낮아서 일본 전국시대에서 보인 미츠나리의 낮은 지휘력을 잘 모른다는 것. 오시 성 전투 - [[행주 대첩]] - [[세키가하라 전투]] 등 대규모 전투 3번에서 미츠나리는 들인 노력에 비해 얻은 결과가 불만족스러운 [[전술]]을 고집하고 [[아군]]의 전력을 불리한 상황에 억지로 쏟아붓거나[* 오시 성에서는(히데요시의 지시였다는 변호는 가능하지만) 아무리 봐도 수공에 적합하지 않은 지형에서 노동력을 들여 억지로 수공을 감행해 아군에 피해를 냈고 [[행주산성]]에서는 전술상으로 최악의 선택인 단순 축차 투입을 감행해서 엄청난 인명 피해를 냈다.] 전력상 유리한 전투에서 엄청난 배신자와 이탈자를 내는 등 아군을 전혀 통솔하지 못했으며 이런 거듭된 졸전에서 볼 때 미츠나리의 군재는 명백하게 평균 이하로 볼 수 있다. 다만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세가 매우 높아 서군에서는 다이묘들이 갈팡질팡한 게 있어서 지휘하기 많이 어려웠으며 실제로 [[고쿠다카]] 최강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으니 전국 다이묘 중 병력을 가장 많이 동원하는 다이묘였다. 어찌어찌해서 쪽수만 간신히 맞춘 것만으로도 미츠나리로서는 대성공인 셈. 물론 행주산성에서의 참패에는 미츠나리의 지휘에도 문제가 있었으니만큼 군재가 뛰어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임진왜란을 다룬다는 웬만한 일본 [[사극]]에도 나오지 않는 [[흑역사]]라 그런지 최근의 재평가 과정에서는 은근슬쩍 빠져있기는 하다. 당대의 형국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표면상으로는 266만 석이라고는 하나, 그의 영향력에 들어간 고쿠다카는 이보다 많았으며[* 원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로 전봉 명령을 받게 되면서 원래 영지였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우미를 내놨지만 히데요시 사후에는 이미 이 땅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특히 이 땅은 간토에서 [[간사이]]로 처들어 올 이에야스를 견제 및 방어하기 위해 다수의 다이묘들을 박아놓은 것인데 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츠구|히데츠구]] 사건을 계기로(도쿠가와의 옛 영지를 받은 이들은 대부분 히데츠구와 친분이 있던 자들이었다.) 히데요시에게 등을 돌리고 이에야스에게 붙게 된다.] 더군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똥꼬쇼]]를 했는지만 보더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쉽게 항복하려 들지 않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자신의 친모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으며 이미 시집가서 유부녀가 된 데다가 나이마저 40살을 훌쩍 넘긴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강제로 이혼시킨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다시 시집보내는 짓을 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이에야스는 항복을 하기는 했지만 자기 영지에 버티고 수도에 히데요시를 참내하러 갈 생각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먼저 만나러 가는 쪽의 격이 낮아지기 때문. 애시당초 전쟁에서 진 것도 아니고 그와 손을 잡았던 오다 노부나가의 머저리 아들 노부카츠가 멋대로 히데요시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전쟁을 할 명분이 사라져버려서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에 불과했다. 거기다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의 동맹이었던 만큼 그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히데요시보다 격이 높았으니 자기가 찾아가기에는 자존심도 상했을 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맞붙기에는 너무 강력한 상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